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준 황후 (문단 편집) === 평민 출신 큰며느리를 반대하다 === 1957년, 아키히토 황태자는 가루이자와(軽井沢)에서 열린 [[테니스]] 시합에서 1살 연하의 평민 쇼다 미치코를 만났다. 약 2년의 연애 끝에, 두 사람은 1959년 4월 10일 결혼식을 올렸다. 이 과정에는 엄청난 반대와 진통이 따랐다. 사실 말이 '평민'이지, 미치코의 친가 쇼다(正田) 가문은 닛신(日清) 제분[* [[대선제분]] 영등포공장이 [[일제강점기]] 이 회사 소유였다.]이라는 대기업을 운영하는 굴지의 재벌가였다. 미치코의 아버지 쇼다 히데사부로(正田英三郎)는 [[독일]]에 [[유학]]을 다녀왔고, 쇼다 일족은 1930~50년대에 벽난로와 [[피아노]]가 갖추어진 서양식 대저택에 살며 서구식 생활을 했고, 홈비디오를 찍었으며, [[골프]]와 [[스키]] 등을 즐기며 [[미국]]과 [[유럽]] 등지로 해외여행을 다녔다. (재벌이라는 위상에 걸맞게, 미치코를 시집보낼 때는 6t 트럭 3대를 [[혼수]]로 꽉꽉 채워 보냈다.) 더군다나 미치코의 외가인 소에지마(副島) 가문은 옛 화족([[백작]])가문 이었다. 집안 뿐 아니라, 미치코 본인의 재능도 우수했다. 미치코는 빼어난 미모에 당시 일본 여성치고는 키도 매우 컸고(161cm), 명문 [[세이신여자대학]] [[영문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공부 외에도 음악, 미술, 스포츠 등등 못 하는 게 없었고, 대학 시절에는 [[학생회장]]을 맡을 정도로 리더십과 친화력도 뛰어났으며, 대학 [[졸업식]] 때는 졸업생 대표로 연설도 했다. 그야말로 무엇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는, 완벽에 가까운 훌륭한 재녀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훌륭한 쇼다 미치코가, 황족들과 화족들에게는 못마땅한 신붓감이었다. 본래 황실의 신붓감은 황족이나 화족 중에서 뽑는 것이 오랜 전통이었고, 특히 그중에서도 장래의 국모가 될 황태자비는 황족 내지는 [[고셋케]] 출신만 뽑았다. 이 오랜 전통이 깨진 것이다. 또한 쇼다 미치코가 등장하기 전에 이미 황태자 후보로 거론되던 규수가 있었다. [[시마즈 하츠코|기타시라카와 하츠코]]라는 규수인데, 그녀는 1939년 출생한 직후부터 장래의 황태자비로 유력하게 거론되었다. 기타시라카와 가문은 옛 방계 황족으로, 하츠코의 할머니 기타시라카와 후사코(北白川房子)는 [[메이지 덴노]]와 측실 [[소노 사치코]]의 7녀이며, 어머니 기타시라카와 사치코(北白川祥子)는 [[화족]]이자 [[고산케]]에 속한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 출신이다. 하츠코는 그야말로, 전통적인 황실 신붓감에 딱 부합하는 인물이었다. 평민 출신의 황태자비 후보 쇼다 미치코에 대한 옛 황족들과 화족들의 반발은 대단했다. 하긴 자신들은 신적강하로 인해 수백년간 이어내려져 오던 높디높은 신분을 잃고 하루아침에 평민으로 전락했는데, 반대로 자신들의 아래로 여기던 평민이 황족, 그것도 장래의 국모가 된다니, 당연한 반응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렇듯 왕의 사랑을 받던 여성들이 출신 때문에 반감을 산 경우는, 굳이 [[일본]]이 아니라도 다른 왕조 국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 유명한 [[희빈 장씨]]만 하더라도 [[양반]]가의 규수는 아니라도 역관 출신 거부의 딸이었는데, 이 당시 대[[재벌]]의 딸인데다가 어디서도 빠지지 않는 규수임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황족 혹은 화족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배척받은 미치코 황후의 출신과 비슷한 면이 있었다. 심지어 미치코 황후는 어머니 쇼다 후미코(正田富美子)가 화족([[백작]]) 소에지마 가문 출신이라, 친가는 평민이지만 외가로부터 화족의 피도 이어받고 있었다. 다만 쇼다 미치코는 아키히토 황태자가 끝까지 지켜내었지만, 희빈 장씨는 [[숙종(조선)|숙종]]에게 버림받았다는 차이도 있다.] 시아버지 쇼와 덴노는 '''"이제 황실에도 새로운 피가 필요하다."'''며 평민 출신의 큰며느리를 감쌌지만, '''[[시어머니]] 나가코 황후는 미치코를 몹시 미워하여''', 두 아랫동서 [[세츠코 비|지치부노미야 세츠코 비]], [[키쿠코 비|다카마츠노미야 키쿠코 비]]와 함께 반대운동을 펼쳤다. 또한 다이쇼 덴노의 외사촌 여동생 [[야나기하라 뱌쿠렌]][* [[야나기하라 뱌쿠렌]]의 언니 이리에 노부코(入江信子)의 아들 이리에 스게마사(入江相政)는 쇼와 덴노의 시종장을 지냈는데, 이때 스게마사가 궁중에서 보고 들은 일들을 적은 궁정일기가 유명하다. 한편 스게마사는 [[유리코 비|미카사노미야 유리코 비]]의 외삼촌이기도 하다.], 이방자 비의 친정어머니 나시모토 이츠코(梨本伊都子)[* 이츠코는 거의 평생에 걸쳐 일기를 썼는데, 당시 일기에 '''"이제 일본도 다 끝났구나!!"'''라고 썼을 정도였다.], 이츠코의 여동생이며 세츠코 비의 친정어머니인 마츠다이라 노부코(松平信子)[* 즉 이방자 비에게는 [[이모]]가 된다. 노부코는 황실의 사돈이라는 배경으로 궁정 내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고, 가쿠슈인 동창회장을 지내며 옛 황족들과 화족들의 우두머리로 군림했으며, 반대운동의 선봉에 섰다. 진짜 이유는 평민이 [[황후]]가 된다는 위기감도 물론 있었겠지만, 쇼다 미치코의 외가인 소에지마 가문이 [[보신 전쟁|무진전쟁]]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등등, '''[[위 아 더 월드|옛 황족들과 화족들이 똘똘 뭉쳐 결혼을 반대]]'''했다. 결국 미치코는 황실로 시집을 왔지만, 그 후로도 그들은 미치코 황태자비에게 '''집요한 학대'''를 가하였다. 기타시라카와 하츠코는 황태자비에서 탈락한 후 나가코 황후의 외가인 시마즈 가문으로 시집갔지만, 나가코 황후는 하츠코의 고모할머니인 호시나 다케코(保科武子)[* 메이지 덴노의 사위인 다케다노미야 츠네히사(竹田宮恒久) 왕의 여동생이며 호시나 마사아키(保科正益, 1833 ~ 1888)의 증손녀이다.]를 자신의 [[시녀]]장(侍女長)으로 두었으며, 다케코가 퇴임한 후로는 하츠코의 어머니인 사치코를 시녀장으로 두었다. 나가코 황후가 누구를 자신의 큰며느리로 삼고 싶었는지 속이 보이는 부분이다. 또한 미치코 황태자비의 시녀장은 마키노 스미코(牧野純子)였는데, 그녀는 미치코 반대운동의 선봉에 섰던 노부코가 손수 추천한 인물이다. 그러니 스미코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뻔하다. 그나마 첫째 [[시누이]] 히가시쿠니 시게코는 남동생 부부에게 보내는 응원의 메시지를 [[신문]]에 게재하기도 하고, 미치코 황태자비를 친정 가족들과 함께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파티를 열어주는 등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요절|시게코는 미치코 황태자비가 황실로 시집온 지 2년 뒤인 1961년 병으로 죽고 말았다.]][* 히가시쿠니 시게코가 만 35세라는 젊은 나이에 죽은 것을 두고도, "여자가 잘못 들어와서 그렇다!!"라며 미치코 황태자비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쇼와 덴노와 나가코 황후는 [[참척|2번째로 자식을 먼저 앞세우고 큰 충격을 받았으나]], 1년 전 태어난 장손 히로노미야 나루히토 친왕을 보며 위안을 삼았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